더운 날씨에 정장을 입고 캐리어를 끄는 유일한 면접자
오전 시험이 끝나고 시험장을 나오는 길에 오후 면접 일정이 담긴 종이를 받았다. 13~18시까지의 면접 일정 중에 나의 차례는 어중간한 14시 30분이었다. 나에게 배정된 면접 시간은 고작 15분. 이 짧은 시간을 위해 난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이다. 먼 길을 왔는데 좀 허무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면접관 입장에서 수십 명을 18시까지 상대하니까 이해가 간다.
학교 지리도 모르고 학생 식당으로 보이는 곳은 이용 방법을 몰라서 점심 식사는 포기했다. 8월의 뜨거운 날씨. 에어컨 밑에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는데 마침 병원에 스타벅스가 있더라. 지도상으로 가까워서 캐리어를 끌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병원을 가로질러 가야 빠른 것이었다.
나는 출입권한이 없으니까 병원 통로를 이용해서 스타벅스를 갈 순 없었고 15분을 돌아서 정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때가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키곤 카페에서 오후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마음이 급하니까 석사 논문 내용에 대한 예상질문/답변, 일반적인 예상질문/답변 등이 잘 외워지지 않더라.
예정된 면접 시간보다 30분 일찍 오라길래 다시 15분을 걸어 돌아갔다. 오후 면접 장소는 오전 시험 장소와 달라서 또 헤매야 했다. 표지판을 따라가긴 했는데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많기도 하니까 어딘지 모르겠다. A4 용지에 적힌 안내문을 따라 어느 건물로 들어갔는데 사람이 별로 안 보인다?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나?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의심이 들어서 1층 행정실로 보이는 곳에 찾아갔다.
일본어로 적혀있어서 정확히 행정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큰 한자로 '출입금지'라고 적혀있었다. 눈치껏 입시 기간이니 외부인이 못 들어가게 해 놓은 곳이 행정실이겠구나 생각해서 노크를 했다. 덩치 큰 남자분이 나왔고 나는 영어로 시험장을 물었다. 예의 있게 내 소개부터하고 시험장을 물어봤는데, 내 말이 끝나니까 영어를 못하는지 구글 번역기를 건네더라 (그럴 거면 미리 주지 ㅋㅋ). 영어로 적어주니 "아~ 잠시만 기다려"하고는 본인이 직접 면접 대기실까지 데려다주는 친절함을 보여주었다.
화장실에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주변을 둘러보니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은 나뿐이다. 거친 바퀴소리와 함께 면접 대기실에 입장했는데 다들 날 쳐다보더라 ㅋㅋ.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캐리어를 끌고 온 외국인이니 당연히 이목이 집중됐겠지. 15분을 걸어오느라 땀도 많이 흘렸고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두근이다.
행정실 직원이 10분마다 수험번호를 부르면 해당 지원자는 면접실 앞에서 또 대기한다.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오고 드디어 나의 수험번호도 불렸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지원한 연구실의 지도교수가 같이 입장하는 것이 아닌가? 뭐지?
내가 석사 지원할 때만 해도 학생이 지원하는 연구실의 지도교수는 이해관계자이기 때문에 형평성을 위해 면접관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일리 있는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는 지도교수가 면접관으로 들어가네? 어쨌든 작은 방에 입장하니 5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다.
자기소개하라는 말도 없고 그저 수험 번호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리곤 바로 질문이 쏟아졌다. 당시 너무 긴장해서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최대한 기억을 살려서 적어본다.
내가 받았던 대학원 면접 질문
- 석사 때의 연구를 보면 왜 이 실험을 했나? 무슨 근거로?
- 이 연구실에 지원한 이유는 무엇인가?
(준비한 대답을 했지만 계속 깊게 파고들었다) 그런 이유라면 굳이 이 연구실에 지원할 필요가 있나? 해당 면역항암을 연구하는 연구실은 많을 텐데? - 현재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그만두고 오는 것인가?
- 직장을 다니다가 왜 박사 과정을 결심한 것인가?
- 왜 이 연구 주제를 선택했나? 왜 이 적응증을 선택했나?
- 가족들은 직장을 관두고 일본으로 오는 것에 동의하는가?
- 일본에서의 목표는 무엇인가?
- 졸업 후의 꿈은 무엇인가?
모두 기억하진 못하지만, 15분이라는 짧은 면접 시간에 이 정도의 질문들을 받았다. 걱정했던 것만큼 일본인 면접관들의 영어 수준이나 발음이 허접하진 않아서 알아들을 순 있었다. 그래도 최대한 집중해야 들을 수 있는 발음. 모든 신경을 그들의 질문에 집중했다. 들리지 않으면 허접한 답변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질문이 내가 예상했던 것들이라서 조리 있게 대답을 할 줄 알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다. 한정된 시간과 5명의 면접관 앞에서 영어로 대답을 해야 하는 나는 긴장감에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화되었다. 호주 다녀온 뒤로 한국에 있으면서 영어 회화 할 일이 많지 않으니 영어실력이 점차 줄었나 보다 ㅠㅠ. 준비한 대답은 100인데 막상 내뱉은 대답은 20 정도.
그래도 모든 질문의 의도에 맞게 대답은 다 했고, 몇 번의 농담을 던질 정도로 면접 분위기는 괜찮았다. 긴장 속의 15분 면접이 끝나고 너무 홀가분했다. 지도교수도 나와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 나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다.
대학원 면접의 핵심 질문은 지원 동기와 목표이다
면접 질문을 보면 연구계획서와 관련된 질문은 1~2개 정도로 과학적 기초 지식을 묻는 경우는 많지 않다(단, PT 면접인 경우엔 연구계획서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하겠지만). 그러나, 원초적인 질문들 지원동기나 선택 이유, 목표에 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물어봤다. 특히 연구실 지원동기는 2~3번에 걸쳐 깊게 질문을 들어왔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지원 동기와 목표에 대한 내용은 나중에 자세히 다뤄볼 예정이다.)
석사 지원자와 박사 지원자에 대한 질문은 당연히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공통적으로 일본 대학원 면접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내가 교수라면? 내가 면접관이라면? 외국인을 면접 볼 때 무엇을 물어볼 텐가? 거꾸로 생각해 보면 된다.
시험 준비를 위해 기출문제를 푸는 것처럼 면접 준비를 위해서는 주변인에게 "너라면 어떤 질문을 할래?" 물어보면 효과적이다. 즉, 모의 면접을 준비하는 것이 도움 된다. 인맥이 있다면, 주변 대학원생들에게 모의면접을 부탁해 보자. (대학원생 인맥이 없으면 유학원에서 준비해 주는 곳도 있다.)
역시 일본이란 나라는 이미 준비된, 학문적으로 뛰어난 학생도 좋지만 지금은 부족해도 그 사람의 포텐셜을 보고 뽑는 것 같다 (어차피 도제식 교육으로 키워낼 테니까). 그래서 한국에서의 스펙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구제국대만 놓고 본다면 학벌세탁 하기엔 상대적으로 쉬운 국가다.
결론적으로 일본 대학원 면접을 준비할 때는 강력한 지원동기와 목표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에 집중하는 것보다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더 구체적으로 준비하자.
일본 대학원 입시를 위한 모든 과정이 끝났다. 지금까지 과정에 반년이 걸린 것인데 어떻게 준비해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었다. 혼자서 도전해서 힘들었던 과정이기에 끝이 나니 너무 후련하다. 반대로 허무하기도 하다. 뭔가 힘이 팍 풀리는 느낌이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직장을 다니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부었다. 반년동안 퇴근하고 쉬지도 못한 채 대학원 입시 준비를 하고 통계·데이터학과 복수 학위까지 동시에 하는데 너무 지쳤다. 이제는 3주 뒤 발표될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합격이 될까 불안해할 틈도 없이 나는 직장으로 돌아가서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불안해한다고 결과가 바뀌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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